2011년 5월 15일

마태복음 6장 25-34절

 

인류 역사상 최고의 사랑의 노래로 알려진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솔로몬이 지은 아가서이다.

아가라는 뜻은 우아할 노래 이며, 본래의 제목은 Song of Song, 노래 중의 노래라는 뜻이다.

아가서는 유대적 전통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신약에서는 예수와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를 상징한다고 전해져 왔다.

그 아가서에 이러한 구절이 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2:15)

포도원은 두 사람이 이룬 가정을 뜻하며, 여우는 이것을 허무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다.

아름다운 포도원에 꽃이 필 때쯤이면, 여우가 나타난다.

이 여우를 잡지 못하면, 우리의 포도원은 쉽게 망가지며, 우리의 기쁨은 쉬 손상된다.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여우를 잡아야 한다.

5, 가정에 달에, 우리의 행복을 허무는 여우 한 마리를 잡기 원한다.

 

예전에 이런 퀴즈가 있었다.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질병에 대한 저항력 파괴, 소화불량, 신경쇠약, 궤양, 두통, 발진, 초조해지고 숨이 가쁘며, 잠을 못 이루게 합니다. 나를 가진 자는 쉽게 피곤해하며, 식욕을 잃고, 소변을 자주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혈압이 변하고, 혈액 속에 화학적인 변화가 생기며, 정서적 반응으로는 성격이 조급해지고, 무관심과 이기적인 기질을 형성하게 한합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답은 염려라는 이름의 작은 여우다.

 

염려에서 자유한 인생이 매우 드물다.

사람이 살아있을 때는 근심에 먹히고, 죽었을 때는 벌레에 먹힌다(탈무드)

미국의 설교가 헨리비처는 사람이 한 가지 일을 할 때도 세가지 고생을 한다고 했다.

일하기 전에는 실패할까 걱정하느라 고생하고

일을 하면서 수고하느라 고생하고

일을 마쳐놓고는 결과에 대해 미리 걱정하느라 고생한다.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염려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보시며 불쌍히 여기셨다.

이건 삶의 정상적인 모습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자들은 세상 근심에 쌓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희락과 기쁨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선포하셨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35:10)

개인적인 영역에서 뿐 아니라 특별히 가정에서도 염려를 추방해야 한다.

삶에 대한 걱정과 염려로 가득한 부모에게서 자녀는 세상이 두려운 것이라고 배운다.

하나님이 주신 기쁨으로 채워져야 할 가정들이 세상이 주는 근심으로 먼저 자리잡게 하고 있다.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기보다는 염려와 근심의 영역으로 확정하고 있다.

이 염려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가정에서 추방해야 한다.

 

염려를 추방해야 하는 이유

1.염려 자체로 아무런 효용이 없다.

염려라는 것은 주어진 상황에 대한 반응이다.

 

노먼 빈센트 필 박사는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글에서 한 연구기관의 조사를 인용하여 밝혔다.

사람이 하는 모든 걱정을 모아서 분석해 보니,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일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 40%,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걱정이 30%,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닌 작은 것에 대한 걱정이 22%,

우리가 어떻게 바꿀 수 없는 사건에 대한 걱정이 4%,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진짜 사건에 대한 걱정이 4%였다.

결국 사람들은 96%의 쓸데없는 걱정 때문에 기쁨도, 웃음도, 마음의 평화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진실이 아니다.

삶이란 이렇게 염려함으로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엇인가를 염려하며 사는 사람은 삶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걱정은 사치스런 한가함에 불과하다(테레사)

 

어떤 부인은 자기 남편이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날까봐 동안을 염려했다고 한다.

결국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9개월의 삶을 걱정과 염려 가운데 보내버리고 말았다.

어느 어부가 고기잡이 갔다가 풍랑을 만나 죽었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가 탔던 배를 타고 바다고 나갔다. 이때 친구들은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바다에서 죽었는데 너도 죽으러 나가느냐?”고 염려하며 말렸다. 그 아들 어부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어디서 죽었느냐? 물론 침대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럼 자네는 어디에서 잘 것인가? 여전히 침대에서 잘 것 아닌가? 염려하지 말게나!”

 

성경은 필요 없는 염려를 하지 말라고 권한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6:27)

2.염려는 해롭다.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해롭기 때문이다.

  수영하러 물에 뛰어들 때에는 준비운동을 하는 것이 옳다.

식사를 한 뒤에 바로 운동하는 것은 좋지 않다.

이것은 몸에 대한 교훈이다.

 

마음에 대한 교훈도 마찬가지다.

염려는 마음에 해롭고, 마음에 해로운 것은 몸에도 해롭다.

위궤양에 걸린 사람들의 대부분이 음식이나 생활습관, 혹은 피곤 때문이 아니라 스트레스 즉 염려 때문인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성경은 염려라는 것의 해악이 육체의 파괴 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을 좀먹는다고 말씀한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17:22)

염려의 가장 큰 해악은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좀먹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15:13).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담대한 마음인데, 세상 걱정에 우리가 눈을 돌리는 동안 하나님의 손길을 외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3.염려는 죄의 영향력이다.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데, 왜 인간에게는 염려하는 습관이 있는가?

사탄이 우리의 마음을 도적질했다.

인간의 염려하는 마음은 죄와 함께 시작되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함께 거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이었다.

그러나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은 뒤에, 즉 죄를 지은 다음에 그들에게 두려움과 근심이 찾아왔다.

가인은 동생을 죽인 후, 하나님이 가인을 쫓아냈을 때에 가인이 염려한 것은 만나는 자들이 자신이 죽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누군가를 죽인 살인이라는 것은 가인 스스로 첫 번째 한 일이다.

그런데 가인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죽일 것이라고 염려하고 있다.

죄의 영향력 아래 있는 자에게는 의심과 근심과 염려가 곧 형벌이기도 하다.

 

염려하고 있는가?

당신은 죄의 영향력 아래 있거나, 또는 죄를 짓고 있는 중일지 모른다. 아니, 짓고 있다.

 

나아가서 성도의 염려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거절이다.

당신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가난하던 시대에는 먹고 사는 것이 염려의 대상이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가진 것이 많아지면서 염려의 이유도 달라졌다.

특히 우리의 많은 염려는 지나치게 이웃을 의식함에서 비롯된다.

내가 성경같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인하여 염려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라.

자녀를 근심하고, 노후를 근심하고, 오염을 근심하고, 세상을 근심하지 않는가?

오히려 염려할 것은 따로 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염려하지 않는 삶을 위하여 무엇이 필요한가?

먼저는, 삶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식이 필요하다.

삶의 목적이 분명하면 염려를 극복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하는 사람은 절대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중요한 것을 선택한 사람은 후회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계획하셨다면,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다.

당신이 당신의 낳은 아기를 바라보며, ‘하나님, 아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며,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도 믿어야 할 것이다.

당신이 배우자를 인하여 감사하며 내 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했다면, 그렇게 만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면, 하나님이 지키실 것도 믿는 것이 옳다.

혹시 배우자와의 갈등이 있더라도 이로 인하여 염려하고 근심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리콜을 요청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계획하셨고, 이 땅애 내셨고, 그의 땅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는 자에게, 삶의 여정에 대한 고백이 있는 자에게 염려와 근심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염려.jpg

 

둘째는, 나는 무엇으로 행복할 수 있는지 선언해야 한다.

내게 무엇이 행복인지를 고백할 때에, 내가 무엇이 있어야 만족할 수 있노라고 선언할 때에 염려를 극복할 수 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는다.

남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말하기를 꺼린다.

월세를 살면서 전세라도 얻으면 행복하다고 말하고는, 전세를 얻고는 내 집이 있어야 행복할 것이라고 말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다.

내가 누리를 것보다 다들 더 누리고 있다고 의기소침 하는 자는 끝없이 염려를 양식으로 삼게 될 것이다.

 

남과는 비교되지 못하는 것으로 행복의 기준을 삼아야 한다.

이를테면 가족이 행복의 이유가 되면 괜찮을 것이다.

세상에 가족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실제로 돈보다 가족을 더 중요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오늘날 심각한 가정파괴 현상은, 과거 경제개발의 기간 동안 잘 살아보는 것, 즉 돈이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문제라고 허리띠를 졸라매던 현상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잘 살아보는 것, 그것 하나를 위해 고향도 버리고, 가족도 헤어져야 했다.

그렇게 해서 돈은 벌었고 이만큼이라도 살게 되었지만, 이미 이 땅의 가정은 돈 없이는 행복할 수 없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인생이 무엇으로 행복해지는지를 우리가 다시 선언하지 않는다면, 절해 행복할 수 없고, 염려를 지울 수 없다.

 

물건이 아닌, 땅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닌, 하늘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행복을 분량을 삼는 자는 이 땅에서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내 것이 많은 자는, 땅에서 난 것으로 행복의 이유를 삼는 자는, 내 것은 내가 지켜야 하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내 것이 하나님의 것인 사람,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인 사람은 걱정하지 않는다.

 

어떤 랍비에게 깍듯하게 인사하는 아이가 있었다.

랍비는 이 아이를 소중히 여기면서 가르치기를 원했고, 아이에게 앞으로 살아가면서 일생에 추구할만한 가치 있는 것을 종이에 적어오라고 하였다.

아이가 가져온 종이에는 명예, 건강, 의 세 가지가 적혀 있었다.

랍비는 아이에게 말했다.

이 모든 것이 소중한 것이지만, 다른 한 가지가 없다면 여기 적힌 세 가지를 전부 가져도 소용이 없단다.’

아이는 놀라서 그게 무엇이냐고 물었고 랍비는 대답했다.

샬롬이다. 샬롬이 없는 명예, 샬롬이 없는 건강, 샬롬이 없는 부는 모두 헛되다

나의 샬롬은 타인의 샬롬과 비교되지 않는다.

그것은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한 염려를 가져라.

오늘 본문 말씀에 염려라는 단어가 여섯 번이나 나온다.

특히 먹을 것, 입을 것을 인한 염려를 언급하고 있다.

 

만일 내 딸이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지내고 있는데, 그 이유를 물어보자 아빠가 자신을 먹여주지 못할까 염려해서라고 말한다면 나는 매우 섭섭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른 염려, 선한 염려를 가지는 것이 옳다.

주님은 세상의 것으로 염려하는 자들에게 명령하신다.

그런즉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염려하려면 그의 나라, 그의 의, 즉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인하여 선한 염려를 하라는 말이다.

어떻게 전도할까, 어떻게 영혼을 구원할까 하는 선한 염려를 주님께 드린다면, 우리가 주님의 그 가벼운 짐을 진다면, 주님은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맡아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염려에 대한 정확한 답은 하나님 나라.

오늘 염려에 대한 말씀은 그 유명한 산상복음에 속하는 내용이다.

산상복음의 제일 첫 교훈인 팔복을 보면 그의 나라, 즉 천국에 대한 교훈이 두 번 나온다.

첫 번째 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

여덟 번째 복,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차라리 이런 염려를 하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염려하는 자의 삶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책임지실 정도가 아니라 이 땅에서도 천국을 살게 하실 것이다.

이정도가 아니라면, 예수 믿는 게 뭐 재미있겠는가?

 

염려를 극복하는 기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4:6-7)

기도하라고 하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은 근심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기도는 했다고 대답한다.

그 때에 종종 또 묻고 싶기도 하다.

진짜 기도했는가? 기도하는 시늉만 낸 것이 아니라 히스기야처럼, 예수님처럼 진짜 기도했는가?

한나가 엘리 제사장의 말을 듣고는 다시는 수심이 없었던 그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하였던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벧전5:7)(Casting all your care upon him)

cast 라는 단어의 제일 첫 번째 뜻이 던지다, 내던지다의 의미이며, 쓸모없는 것을 내던진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왜 쓸모없는 것을 힘들게 가지고 다니는가?

 

루터는 문득 자신이 섬기고 있는 교회와 성도들을 인하여 근심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루터는 무릎을 꿇어 기도하며 아뢰었다.

하나님, 이 교회가 제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교회인 것을 압니다. 이 양떼들은 내 양떼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 밤에 루터는 단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한다.

염려를 주님께 맡기라

 

5, 가정의 달에 모든 양천중앙의 가정이 염려를 극복한 행복한 가정이 되기 바란다.

염려가 깃들 곳이 없는,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무장한 가정이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