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딩게시판 - 중딩과 고딩들의 공간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 로마서1:16-17, 주현절후 다섯째 주일, 2012년 2월5일 -
|
<설교본문> |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1.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로마서는 바울이 3차 전도여정을 마칠 즈음에 고린도에 3달간 머물면서 쓴 편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편지 서두에서 자신이 로마에 가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를 말합니다. 로마서 1장 10절과 1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떻게 하든지’ 와 ‘간절히 원하는’이란 표현에서 우리는 그가 로마에 가기를 얼마나 진심으로 원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왜 이토록 로마에 가고자 했던 것일까요? 로마에 무슨 좋은 것이 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로마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를 만나고자 하는 것일까요. 저처럼 해외여행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해서 이태리 로마의 멎진 관경을 보고자 했던 것일까요. 아마 그런 연유는 아닐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했던 진짜 이유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살펴보기로 하고, 우리는 바울에게 이런 조언을 해주고 싶습니다. “당신이 정말 로마에 가고 싶다면 가면 되지 않나요?” 그렇게 가고 싶다면, 그리고 꼭 가야만 하는 것이라면 고민만 할 것이 아니라 무언가 실제적인 행동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에 머물고 있던 고린도 지역은 로마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과장을 조금 섞으면 고린도 바로 옆 동네가 로마입니다. 지중해를 타고 조금만 가면 바로 닿을 수 있습니다. 그가 만일 로마에 가고자 한다면 지금이 가장 좋은 타이밍인 것이지요.
그러나 사실 바울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미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3차 전도여행을 준비할 즈음에는 로마에 갈 계획을 세웠지만(행19:21), 그는 지금 로마를 코앞에 두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중심으로 아가야와 마게도냐 지방의 여러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해서 연보를 모았기 때문입니다. 헬라지역의 이방인으로 살면서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 은혜에 참여하게 된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물질을 그들과 함께 나누기로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많은 금액의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안전하게 전달해야할 책임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바울은 지금 당장 로마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안타깝지만 그는 로마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대신하여 편지를 써서 로마를 먼저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그 편지에서 바울은 후에 자신이 로마를 직접 방문하게 되면 하게 될 말을 정리해서 전달하였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아는 로마서입니다.
바울은 로마서1:15에서 자신이 로마에 가고자 한 진짜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그렇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했던 이유도, 그리고 이렇게 편지를 쓰는 목적도 다름 아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사실 로마에는 이미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 사실을 이미 바울 자신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서1:7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편지를 받게 될 대상을 분명하게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로마에 복음이 전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까지도 세워졌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간 적이 없는데 어떻게 로마에 교회가 있을 수 있나하고 의아해 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당시에 바울 외에도 많은 전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열심히 전도여행을 다니는 중에 사도들과 많은 제자들도 곳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물론 거짓 진리를 전하는 무리도 있었고 때론 복음이 왜곡되게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어쨌든 복음은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고 여러 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로마는 세계의 중심이어서 복음이 로마에 전해지자 이제 복음은 온 세상에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08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이처럼 로마에는 이미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도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그들에게 또 다시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로마에 복음이 전파된 사실을 바울이 몰라서 그런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바울은 그것을 알고도 굳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다시 한 번 복음을 전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2.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바울은 로마서1:15에서 자신은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전하기를 원한다고 말한 다음, 이어서 16-17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말을 생각해봅시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니, 그것이 무슨 말일까요? 반대로 복음을 부끄러워 할 수도 있다는 말인데, 그럼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일까요.
사람들은 이 말을 보통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의 경우로 생각합니다. 첫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창피하게 생각하여 그 사실을 숨기는 경우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정작 본인 스스로는 진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신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실재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종교의 하나쯤으로 여깁니다. 그들은 많은 종교 중에서 기독교라는 한 종교를 택했을 뿐입니다. 그들이 기독교를 택하는 이유는 보통 그것이 다른 종교보다 조금 더 고생해 보이기 때문이거나, 기독교가 가장 규모가 큰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기독교가 종교 중에서는 대세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니면 부모님이나 가정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이지요.
그런데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자체가 진리를 부끄럽게 하는 시대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과학기술과 학문이 발달한 오늘날에 종교라는 것은 조금 열등한 것처럼 보입니다. 종교가 모든 것의 중심이었던 때는 이미 아주 오래전의 일입니다. 더구나 요즘처럼 모든 것이 상대화되어가는 포스트모더니즘시대에는 절대기준 같은 것이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진리니 구원이니 하면서 믿음을 강조하는 기독교는 어리석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런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뭐 진리? 요즘 같은 시대에도 그런 말을 하냐. 네가 봤어! 보지도 않고서 거짓말 치고 있고만. 내가 한 수 가르쳐 줄 테니 잘 들어. 하나님이 왜 보이지 않는지 알아? 그건 간단해. 하나님이 없어서 그런 거야. 교회에 다니는 거야 좋지. 좋은 말도 듣고, 사람도 만나고, 나쁠 건 없어. 하지만 적당히 해야 하는 거야. 너무 빠지면 못써!” 그러나 우리가 이런 말을 들을 때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진짜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복음을 믿는 우리들이 아니라, 구원의 문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무시하고 믿지 않는 그들이니까요. 생각해보십시오. 노아가 구원의 방주를 짓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까? 아니면 다 만들어진 방주를 보고도 타지 않으면서 노아를 비웃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까?
둘째는 자기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면서도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들은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거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앞의 경우보다는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신앙과 삶이 일치가 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경우에 속할 것입니다. 이를테면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신앙양심을 버려가면서까지 술자리를 가지는 것 등입니다. 그러나 참 된 신앙은 지식에만 머물거나 종교적인 삶의 자리에서만 행해지는 의식이 아닙니다. 신앙은 그 자체로 예배이자 또한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이란 표현을 쓰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도 자신의 편지에서 복음을 제시한 다음에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권면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않는 다면 그것은 분명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이 두 경우와는 조금 다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는 복음에 합당하게 살았기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도 아닙니다. 물론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하여서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 가졌던 고상한 신분을 배설물처럼 여긴다고도 말했습니다. 또 그는 그 누구보다도 복음에 합당하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워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복음이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복음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 가치를 모른다면 그것을 부끄러워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예전에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서 짧게 소개합니다. 어떤 골동품 수집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로 시골마을을 찾아다니면서 골동품을 수집했습니다. 왜냐하면 시골 노인들은 골동품의 가치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생활에 사용하는데, 약간의 돈만 주면 그것을 아주 쉽게 구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어떤 때는 아주 횡재를 하기도 했던 것이지요. 물병으로 쓰던 건데 알고 보니 고려청자였더라, 뭐 이런 식입니다. 하루는 그 사람이 어느 시골을 지나다가 아주 진귀한 사기그릇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개 밥그릇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수집가는 어떻게 하면 저 사기그릇을 쉽게 구할 수 있을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묘수를 생각해냈습니다. 그리고는 개 주인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가 참 잘 생겼습니다. 제가 개를 좋아해서 그러는데 값은 얼마든지 쳐 드릴 테니 개를 제게 파시지요.” 주인은 그럽시다하고는 선뜻 개를 팔겠다고 응했습니다. 시골 똥개를 이렇게 비싸게 산다는데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수집가는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다시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저, 그런데 기왕 이렇게 개를 파셨으니 말입니다. 저 밥그릇은 그냥 주시면 어떻습니까?” 그러자 주인이 딱 잘라 말했습니다. “그건 절대 안 됩니다. 이 그릇은 아주 귀한 것이라오. 이것 때문에 제가 얼마나 개를 비싸게 잘 팔 수 있는데 그러시오.” 그래서 결국 그 수집가는 하는 수 없이 시골 똥개를 아주 비싸게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는 그런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냥 웃으면서 넘길 수 있는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개 주인은 정말 그 그릇의 가치를 제대로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주인은 그 그릇을 아주 귀하게 생각하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유용한 것이기도 했지요. 그것 때문에 개를 잘 팔수가 있었고 또 부자도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주인이 그릇의 가치를 정확하게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주인은 그 그릇을 진귀한 골동품이 아닌 좋은 개 밥그릇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그 주인인 골동품을 부끄러워 한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즉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또 복음에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로마서1:16-17에서 그것을 말합니다. 16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그렇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구원이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복음이 어떻게 우리에게 구원이 된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는 17절에서 이렇게 답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나타난 부활 생명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에게 새 생명 곧 구원의 길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으로 그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신비를 정확하게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그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는 바울의 복음을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2을 보면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들이 보기에나 이방인들이 보기에나 별 볼일 없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대단한 기적도 놀라운 지혜도 없고, 오직 무기력하게 죽은 한 사내에 대한 이야기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보지 못하는 기적과 지혜를 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는 죽음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기적이, 그리고 모든 죄인들을 구원할 하나님의 지혜가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전한 복음은 단지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또는 그저 그런 종교적인 가르침도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미 복음을 전해들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다시 한 번 복음을 전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람의 말이나 가르침이 아닌 하나님의 지혜에 붙들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그저 말로 듣고 이해하는 수준이 아닌 실재로 구원에 참여하는 영적인 새 현실성(reality)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바울처럼 복음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을 믿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는 바울이 살던 때보다 훨씬 놀라운 일들이 많습니다.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문명의 이기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지식에 있어서도 그 어느 때보다도 놀라운 진보를 이루어냈습니다. 쉽게 말해서 못하는 것이 없고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능력과 지혜로도 우리의 생명이 확보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이 시대에도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오직 우리의 구원으로 또 하나님의 능력으로 알고 믿읍시다.



전도사님 말씀 전하고 전도 하시느라 오늘 수고마니 하셧습니다^^
한 주간도 승리하시고 담 주일에 봅시다